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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시한부 인생

미돌 2014.10.20 21:55

큰아버지가 시한부 선고를 받고 병원에 입원하신지 2주째. 주말에 KTX를 타고 혼자 대구에 다녀왔다.
기차로 왕복 네시간 거리인데 뭐가 그리 바쁘다고 병문안을 자꾸 미뤘는지... 창밖의 가을 햇살이 눈이 아플 정도이다.
혼자서 기차여행이 얼마만인가. 이 소중한 혼자만의 시간에 갓 구운 단팥빵과 향기로운 커피와 하루키의 수필, 스마트폰을 친구 삼아 꿀같은 여유를 보낸다. 

어릴 적 한동네에서 함께 살았단 큰집과 우리집은 각별한 사이였다. 
아침 저녁으로 마주대하며 내 유년기의 대부분을 함께 한 큰아버지. 아버지도 큰아버지를 아버지처럼 여기신다. 
어릴 적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화끈하신 성격의 큰아버지를 무서워한 적도 있었지만, 커서는 마음 따뜻하게 챙겨주시는 걸 잘 안다.

항상 가족을 최우선으로 여기시며, 가진 걸 모두 내주시는 큰아버지. 칠순까지도 농사일을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정정하셨다.
그러다 얼마전 덜컥 찾아든 불청객, 지독하게 완쾌가 어렵다는 담낭암 선고 4개월 째.
진단 후 암세포가 번져 절제 수술이 안된다고 해 항암 치료를 잘 받으시는가했더니 이젠 복수가 차고 통증도 제법 찾아오는 모양이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내내 눈앞이 흐려지고 먹먹했는데, 직접 뵈니 병원에서 관리를 잘해서 그런지 걱정했던것보다는 평온해 보이셨다.
막 머리를 감고 꽃단장을 하고 계시는 큰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니까 눈이 휘둥그래지신다.
예고도 없이 갑작스런 조카의 서프라이즈 방문에 무척 반가워하시는 눈치다.
역시 오기를 잘했다. 희미하게 웃으시는 큰아버지가 가슴 아프다.

입맛이 없어 식사도 절반을 채 못하신다는 말을 듣고 뭘 사갈까 하다가 청도 반건시와 안동마보리빵을 사갖고 갔더니 잘 드신다.
다행이다. 내가 사간 정성을 생각해서 억지도 드신건 아닌지... 

대구에 사는 작은 언니도 곧 도착했다. 언니는 자주 병문안 왔는데 내가 얼굴 볼 겸 불러냈다.
잠시 얘기를 나누는데 먼 친척 고모님 두 분이 맛있는 음식을 한아름해서 오셨다.
찰밥과 흰밥, 미역국, 배추김치, 열무 총각김치, 멸치볶음 등등 몸에 좋다는건 다 준비하셨다. 이런게 사람사는 정인가보다. 
직접 담그셨다는 젓갈로 담근 총각김치가 어찌나 맛있는지 병실에서 체면도 없이 환자와 같이 밥 한그릇을 뚝딱 비웠다.

큰아버지께서 전화를 드시더니 대구에 사시는 작은고모를 불러내셨다. 걸어서 5분거리에 사시는통에 거의 매일 출근하시는가보다.
어릴 적 고모네에 자주 놀러가곤 했는데 결혼 후에는 얼굴 뵌지도 몇년이 훌쩍 지난 터라 나도 오랫만에 참 반가웠다. 
고모가 오시니 5인실 병실에 쩌렁쩌렁 세 고모님들의 수다가 가득찼다. 혼자 병상에 있던 남자들이 하나둘 휴게실로 자리를 피한다.
난 그 얘기가 어찌나 재밌는지 옆에서 참견을 했다. 자식 얘기, 건강 얘기, 인생 얘기가 흥미진진하다. 

젊은 시절 노름에 바람에 고생을 시킨 남편이 늙어서 너무 밉다는 먼 친척 고모님. 
아이들 학비까지 다 벌어 돈벌고 살림하며 억척스럽게 키웠는데 이제는 잠잠해진 남편을 보기만 해도 화가 난다는 것.
일종의 스트레스로 인한 '울화병'인 셈. 정신과에 가서 진료도 받고 약도 먹어봤지만, 극복이 쉽지 않은 모양이다. 
반찬 솜씨도 훌륭하고 아이들도 잘 키우고 성격도 쿨하신데다 유머감각도 탁월하신 분인데 '황혼 이혼'을 하고 싶다시니 정말 안타깝다.

작은 고모는 결혼을 잘해서 평생 돈벌어보지도 않고 편안하게 남편에게 사랑받고 아이 셋과 유복하게 사셨는데 몇년 전 고모부를 돌아가셨다.
인생이 모든 것을 다 허락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처음에는 허전한 마음에 시작한 집 앞 텃밭 농사에 기대 힘든 시기를 이겨내셨단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텃밭에 나가 이것저것 상추며 고추를 키우는 재미가 쏠쏠하단다. 
노년에 농사가 노동으로 힘들긴 해도 건강에도 좋고 마음도 힐링이 된다니 황혼을 나는 좋은 방법인것 같다. 

어느 누구나 저마다의 인생이 녹녹하지는 않은가보다. 
누구나 시한부 인생을 산다. 그러나 정작 시한부를 선고받고 나면 어떤 기분이 들지 나는 도무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큰아버지는 시한부 선고를 담담하게 받아들이시는 것 같다. 대화를 하는 사이사이 유머도 구사하신다. 
이런 상황에서 고모님들은 큰아버지 문병을 왔는지, 계모임을 왔는지 모를 끝없는 대화를 세시간 이상 계속하신다.

나와 언니는 세시간만에 인사를 드리고 먼저 역으로 향했다.
누구에게나 매일 하루하루 버티는 것이 인생인 것 같다.
그래도 인생은 계속된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저자
셸리 케이건 지음
출판사
엘도라도 | 2012-11-21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JUSTICE’·‘HAPPINESS’에 이은 아이비리그 3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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